영어성경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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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님의 교리

최고관리자
2018.08.12 10:18 118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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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Holy Father’s Catechesis (General Audience on August 8, 2018)

 

Dear Brothers and Sisters, good morning! Today we continue to meditate on the Decalogue, reflecting further on the theme of idolatry, of which we spoke last week. Now we take up the theme because it’s very important to know it. And we take our cue from the idol par excellence, the golden calf, of which the Book of Exodus speaks (32:1-8) of which we just heard a passage. This episode has a precise context: the desert, where the people wait for Moses, who went up the mountain to receive God’s instructions.

 

교황님의 교리 (2018.8.8. 일반접견)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은, 지난주에 우상숭배를 주제로 생각해본 것에 이어 십계명에 대한 묵상을 이어가겠습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기에, 여기서 그 주제를 계속 다루겠습니다. 조금 전에 한 구절을 읽었던, 탈출기(32:1-8)에 등장하는 빼어난 우상인 금송아지를 다시 생각해봅시다. 이 사건에는 사막이라는 분명한 맥락이 있습니다. 백성들이 하느님의 계시를 받기 위해 산으로 올라간 모세를 기다리는 그 사막입니다.

 

What is the desert? It’s a place where precariousness and insecurity reign there is nothing in the desert , where water, food and shelter are lacking. The desert is an image of human life, whose condition is uncertain and doesn’t have inviolable guarantees. Such insecurity generates primary anxieties in man, which Jesus mentions in the Gospel: “What will we eat? What will we drink? What will we wear?” (Matthew 6:31). They are the primary anxieties. And the desert sparks these anxieties. And in that desert something happens that triggers idolatry: “Moses delayed to come down from the mountain” (Exodus 32:1). He stayed there 40 days and the people became impatient. The point of reference was lacking, which Moses was: the leader, the head, the reassuring guide, and this became unbearable. Then the people asked for a visible god this is the trap in which the people fell which they could identify and be guided. And they said to Aaron: “Make us god, who shall go before us!” ”Make us a head, make us a leader.” To flee from precariousness, the precariousness of the desert human nature seeks a “do-it-yourself” religion: if God doesn’t make Himself seen, we make a god to our measure. “Before an idol one doesn’t risk the possibility of a call that makes one come out of one’s securities, because idols ‘have mouths, but do not speak’ (Psalm 115:5). Then we understand that an idol is a pretext to put oneself at the center of reality, in adoration of the work of one’s hands” (Encyclical Lumen Fidei, 13).

 

사막이란 무엇입니까? 사막은 위태롭고 불안전한 통치 지역입니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 식량, 쉴 곳이 모두 부족합니다. 사막은 불확실한 상태에 있고, 신성한 약속이 보장되지 않은, 인간 삶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불안전감은, 예수님이 복음에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 입을까?”(마태오 6:31)라고 말씀하셨듯이, 인간에게 근본적인 불안을 야기합니다. 이것들은 근본적인 불안입니다. 그리고 사막은, 이러한 불안을 촉발시킵니다. 그리고 그 사막에서 우상숭배를 촉발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모세가 산에서 오래도록 내려오지 않았다” (탈출기 32:1). 모세는 산에서 40일을 보냈고, 백성들은 조급해졌습니다. 지도자이자, 우두머리이자, 불안을 없애주는 안내자인 모세가 기준을 제시해주지 못하였고, 백성들은 이것을 견지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은 그들이 확인할 수 있고, 인도받을 수 있는, 눈에 보이는 신을 요구했습니다. 이것이 사람들이 빠진 함정입니다. 그들은 아론에게 말했습니다. “우리에게 우리를 이끌어 줄 신을 만들어 주십시오.” “우리에게 지도자를, 우두머리를 만들어 주십시오.” 위태로움에서, 사막의 불안정함에서 벗어나게 해주십시오. 인간 본성은 자체적으로 종교를 쫓습니다. 만약 신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기준으로 신을 만듭니다. “우상 앞에서 인간은, 자신의 안전감 밖으로 나오길 요구하는 부름을 들을 가능성의 위험이 없습니다. 우상은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기’(시편 115:5)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상이 우리가 스스로 한 일을 숭배하며 우리를 현실의 중심에 놓는 구실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Aaron is unable to oppose the people’s request and he creates a molten calf. The calf had a double meaning in the ancient Near East: on one hand it represented fecundity and abundance and, on the other, energy and strength. But first of all it was of gold, therefore it was a symbol of wealth, success, power and money. They are the constant temptations! See what the golden calf is: the symbol of all the desires that give the illusion of freedom and instead enslave, because an idol always enslaves. There is the fascination and one goes for it. The fascination of the serpent, which looks at the little bird and the little bird stays, without being able to move, and the serpent takes it. Aaron was unable to oppose them.

 

아론은 백성들의 요구에 반대할 수 없었고, 금송아지를 만듭니다. 고대 근동지역에서 송아지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었습니다. 우선, 비옥함과 풍요로움을 나타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에너지와 힘을 의미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성경에서 이 송아지는 금이었습니다. 따라서 부와 성공, 권력, 돈을 상징합니다. 이것들을 끊임없는 유혹입니다! 금송아지가 무엇인지 보십시오. 자유의 환영을 주지만, 우리를 노예로 만드는 모든 욕망의 상징입니다. 우상은 늘 우리를 노예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매혹적이고, 인간은 그것을 향해 갑니다. 작은 새를 바라보고, 작은 새를 움직일 수 없게 만들어 앗아가는 뱀의 매혹입니다. 아론은 백성들에게 반대할 수 없었습니다.

 

However, all stems from the inability to trust above all in God, to put our securities in Him, to let Him give true profundity to our heart’s desires. This enables one to endure even weakness, uncertainty and precariousness. Reference to God makes one strong in weakness, in uncertainty and also in precariousness. Without God’s primacy, one falls easily into idolatry and is happy with meager reassurances. But this is a temptation that we always read about in the Bible. And think this well: it didn’t cost God so much work to liberate the people from Egypt. He did so with signs of power <and> of love. However, God’s great work was to take Egypt out of the people’s heart, namely, to take idolatry out from the people’s heart. And God continues to work again to take it out of our hearts. This is God’s great work: to take out “that Egypt” that we carry inside, which is the fascination of idolatry.

 

그러나, 모든 것은 무엇보다 주님 안에서 안전감을 찾고, 우리 마음의 욕망을 참된 깊이로 이끄시도록, 주님을 믿지 못한 것에 기원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나약함, 불확실함, 위태로움마저도 인내할 수 있게 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나약함, 불확실함, 위태로움 안에서도 우리를 강하게 해줍니다. 주님을 우선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쉽게 우상숭배에 빠지게 되고, 빈약한 확신에 행복해 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늘 성경에서 읽는 유혹입니다. 그리고, 이 점을 잘 생각해 보십시오. 이집트에서 백성들을 탈출시키기 위해 하느님은 많은 일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은 힘과 사랑의 증거를 통해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큰 업적은 백성들의 마음에서 이집트를 없애신 것입니다. , 백성의 마음에서 우상숭배를 제거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마음에서 우상숭배를 없애시는 일을 계속 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큰 업적입니다. 사람들 마음 속에 있는 우상숭배의 매혹의 대상이었던 그 이집트를 제거하신 것입니다.

 

When one welcomes the God of Jesus Christ, who though He was rich became poor for us (Cf. 2 Corinthians 8:9), one then discovers that to recognize one’s weakness is not the disgrace of human life, but is the condition to open oneself to Him who is truly strong. Then, God’s salvation enters through the door of <one’s> weakness (Cf. 2 Corinthians 12:10); it’s by dint of his insufficiency that man opens to God’s paternity. Man’s freedom stems from allowing the true God to be his only Lord. And this enables us to accept our fragility and reject the idols of our heart.

 

부유하시면서도 우리를 위해 가난하게 되신(cf. 2코린8: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때, 우리는 우리의 나약함을 알아채는 것이 우리 삶을 수치스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강하신 예수님에게 우리를 여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주님의 구원이 우리 나약함의 문을 통해 들어옵니다(cf. 2코린12:10). 주님과 가족이 되는 것은 우리 부족함을 통해서 입니다. 인간의 자유는 유일신이신 참된 주님을 받아들이는 것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취약함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해주고, 우리 마음의 우상을 거부할 수 있게 합니다.

 

We Christians turn our gaze to Christ crucified (Cf. John 19:37), who was weak, scorned and stripped of all possessions. However, in Him is revealed the face of the true God, the glory of love and not that of the glittering deceit. Isaiah says: ”With His stripes we are healed” (53:5). We were healed in fact by the weakness of a man who was God, by His wounds. And, from our weaknesses, we can open ourselves to God’s salvation. Our healing comes from Him who made Himself poor, who accepted failure, who took to the end our precariousness to fill it with love and with strength. He came to reveal to us God’s paternity; in Christ our fragility is not longer a malediction, but a place of encounter with the Father and source of new strength from on high.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약해지고, 멸시받으시고, 모든 것을 잃으신 예수님을 바라봅니다(cf. 요한19:37). 하지만,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화려한 속임수가 아닌 사랑의 영광을 보여주는 참된 주님의 얼굴을 발견합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의 상처로 우리는 나았다”(53:5). 우리는 사실상 주님을 대신해서 오신 예수님의 약함으로부터, 그의 상처로부터 치유 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나약함을 통해 우리는 주님의 구원을 향해 다가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치유는 자신을 가난하게 하시고, 실패를 받아들이셨으며, 우리의 위태로움을 끝내시고, 그것을 사랑과 강인함으로 채우신 예수님으로부터 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느님을 보여주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의 취약함은 더 이상 저주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주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이자, 높은 곳으로부터 오는 새로운 힘의 원천입니다.

 

[Original text: Italian] [ZENIT’s working translation by Virginia M. Forrester]

한글 번역: 황민영 줄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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