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성경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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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님의 교리

최고관리자
2018.06.21 17:46 202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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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Holy Father’s Catechesis (General Audience on June 13, 2018)

 

Dear Brothers and Sisters, good morning! Today is the feast of Saint Anthony of Padua. Who among you is called Anthony? an applause for all the “Anthonys.” We begin today a new itinerary of catecheses on the subject of the Commandments, the Commandments of God’s law. To introduce it, we take inspiration from the passage we just heard: the meeting between Jesus and a man he is a youth who, kneeling, asks Him how he can inherit eternal life (Cf. Mark 10:17-21). And in that question is the challenge of every existence, ours also: the desire for a full, infinite life. However, what should one do to attain it? What path should one follow? To live truly, to live a noble existence . . . How many young people seek to “live” and destroy themselves by going after ephemeral things.

 

교황님의 교리 (일반 접견 2018. 6. 13.)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파두아의 성 안토니오 축일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안토니오 본명 가진 분 계십니까? - 모든 안토니오에게 환호를 보냅니다. 오늘 우리는 계명, 하느님의 계명에 대한 교리의 새로운 여정을 시작합니다. 들어가기 위해서 우리는 방금 들은 성경 구절에서 영감을 받습니다. 예수님과 젊은이가 만나는 장면입니다. 이 젊은이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여쭙니다. (마르코 10,17-21 참조) 그 질문 안에 존재하는 모두의 도전이 있습니다. 우리의 도전이기도 합니다. 충만 되고 영원한 생명에 대한 열망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얻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요? 어떤 길을 가야 할까요? 진정한 삶 그리고 고상한 존재로 살기 위해서 많은 젊은이들이 살기를 추구하지만 결국 헛된 것들을 추구함으로써 자신을 파괴합니다.

 

Some think that it’s better to extinguish this impulse the impulse to live because it’s dangerous. I would like to say, especially to young people: our worst enemy is not concrete problems, no matter how serious and dramatic they are. The greatest danger of life is an evil spirit of adaptation, which isn’t meekness or humility, but mediocrity, pusillanimity. [1] Is a mediocre youth a youth with a future or not? No! He remains there, doesn’t grow, won’t have success mediocrity or pusillanimity. Those young people that are afraid of everything: “No, I’m like this . . .” These young people won’t go forward. Meekness and strength are needed and no pusillanimity, no mediocrity. Blessed Pier Giorgio Frassati who was a youth said that one must live, not just bumbling along.[2]

 

어떤 사람들은 잘 살려고 하는 충동은 위험하기 때문에 꺼버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특별히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들의 가장 큰 적은 심각하고 극적이고 구체적인 문제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삶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사악한 적응의 정신입니다. 그것은 온유함이나 겸손함이 아니고 뜨뜻미지근함과 소심함입니다. 뜨뜻미지근한 젊은이가 미래를 가진 젊은이일까요 아닐까요? 아닙니다. 그런 젊은이는 그곳에서 더 이상 성장하지 않습니다. 성공하지 못합니다. 뜨뜻미지근하고 소심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두려워하는 그런 사람들은 아냐, 난 이래...”하고 얘기합니다. 이런 젊은이들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소심함과 중간(뜨뜻미지근함)이 아니고 온유함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젊은이인 복자 피엘 죠지오 프라사티가 말했습니다. 사람은 그저 목표 없는 삶이 아닌 진정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The mediocre just bumble along. One must live with the force of life. It is necessary to ask the heavenly Father the gift of healthy anxiety for young people. However, at home, in your homes, in every family, when a youth is seen who sits the whole day, sometimes the mother and father think: “but he must be sick, have something,” and they take him to the doctor. The life of a youth is to go forward, to be restless, <to have> healthy anxiety, the capacity not to be content with a life without beauty, without color. If young people aren’t hungry for an authentic life, I wonder, where will humanity end? Where will humanity end with quiet, not restless, young people?

 

중간의 사람은 목표 없이 살아갈 뿐입니다. 사람은 생명의 힘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젊은이들은 하늘의 아버지께 건강한 열망의 선물을 청해야 합니다. 그런데 집에 바로 여러분의 집에 젊은이가 하루 종일 앉아 있다면 부모님이 생각하기를 아픈 것이 분명해...”하고 그를 병원에 데려갈 것입니다. 젊은이의 삶은 앞으로 나아갑니다. 가만히 있지를 않습니다. 건강한 열정을 가지고 있고, 아름다움과 색깔이 없는 그런 삶에 만족하지 못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진정한 삶에 대한 허전함이 없다면 인류의 운명은 어떨까요? 쉴 새 없이 움직이지 않고 조용하기만 한 젊은이들만 있다면 인류는 어떻게 될까요?

 

The question of that man of the Gospel that we heard, is inside each one of us: how is life found, life in abundance, happiness? Jesus answers: “You know the Commandments” (v. 19), and He quotes part of the Decalogue. It’s a pedagogical process, with which Jesus wants to guide to a specific place; in fact it’s already clear, by his question, that that man doesn’t have the full life; he is seeking more and is restless. So, what must he understand? He says: “Teacher, all these I have observed from my youth” (v. 20).

 

복음에 나오는 젊은이의 질문은 우리 모두의 것이기도 합니다. 충만 되고 행복한 삶은 어떻게 발견할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 답하십니다. “너는 계명들을 알고 있지 않느냐?” (마르코 10,19) 하시고는 십계명 중의 몇 계명을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특정한 곳으로 인도하실 때 쓰시는 교수법입니다. 사실 그의 질문에 이미 그가 충만 된 삶을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는 더 많은 것을 끊임없이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알아야 할까요? 그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마르코 10,20)

 

How does one pass from youth to maturity? When one begins to accepts one’s limitations. One becomes adult when one realizes and becomes aware of “what is lacking” (Cf. v. 21). This man is constrained to recognize that all that he can “do” doesn’t exceed a “roof,” doesn’t go beyond a margin.

 

청년이 성인으로 변하는 시기가 언제일까요?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기 시작할 때입니다. “무엇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성인이 됩니다. (21절 참조) 이 사람은 그가 수 있는 최선이 지붕을 뚫지 못하고 경계를 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How good it is to be men and women! How precious is our existence! And yet there is a truth that in this history of the last centuries man has often rejected, with tragic consequences: the truth of his limitations.

 

인간인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합니까? 그런데 지난 세기의 역사에서 인간이 종종 인간의 한계에 대한 진리를 부정하였고 그것은 비극적인 결과들은 초래한 것이 사실입니다.

 

In the Gospel, Jesus says something that can help us: “Think not that I have come to abolish the Law and the Prophets; I have come not to abolish them but to fulfil them” (Matthew 5:17). The Lord Jesus gives the fulfilment; He came for this. That man should reach the threshold in one leap, where the possibility opens to stop living for himself, for his works, for his goods and precisely because he lacks the full life leave everything to follow the Lord.[3] In hindsight, in Jesus’ final invitation immense, wonderful there isn’t the proposal of poverty, but of richness, the true one: “You lack one thing; go, sell what you have, and give to the poor, and you will have treasure in Heaven; and come, follow me.” (v. 21).

 

복음의 예수님의 다음 말씀이 우리의 이해에 도움이 됩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마태오 5,17) 주 예수님께서 충만함을 주십니다. 그분은 이것을 위해 오셨습니다. 그 사람은 한 번의 도약으로 경계를 넘을 수 있었습니다. 자신을 위한 삶, 자신의 일을 위한 삶, 자신의 선을 위한 삶을 멈추고, - 충만 된 삶이 부족하기 때문에 - 모든 것을 뒤로 두고 주님을 따르는 길이 활짝 열린 경계입니다. 이제 보면, 예수님의 - 엄청나고 놀라운 - 마지막 초대에 빈곤에 대한 제의는 없고 오히려 풍요와 진리의 제안이 있습니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마르코 10,21)

 

Who, being able to choose between an original and a copy, would choose the copy? Here is the challenge: to find the original of life, not the copy. Jesus doesn’t offer surrogates, but true life, true love, true richness! How will young people be able to follow us in the faith if they don’t see us choose the original, if they see us accustomed to half measures? It’s awful to find Christians of half measure, Christian I permit myself the word “dwarfs”; they grow up to a certain stature and then <stop>; Christians with the heart shrunken, closed. It’s awful to find this. What is needed is the example of someone that invites me to a “beyond,” to a “more,” to grow a bit. Saint Ignatius called it the “more,” “the fire, the fervor of the action, which shakes the sleepy.”[4]

 

진본과 사본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을 때 누가 사본을 택할까요? 여기에 도전이 있습니다. 사본이 아닌 원본의 삶을 찾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대체 삶을 제안하지 않으시고 진정한 삶, 진정한 사랑, 진정한 풍요를 제안하십니다. 젊은이들이 우리가 원본을 선택하는 것을 보지 않고, 우리가 중간정도에 익숙해 있는 것을 본다면 젊은이들이 어떻게 신앙적으로 우리를 따를 수 있을까요? 중간의 크리스천은 끔찍합니다. 저 자신에게 이런 단어를 쓰도록 허락하여, 그들은 크리스천 난쟁이입니다. 그들은 어떤 상태까지 성장하고 <멈춥니다.> 가슴이 졸아들고 닫친 크리스천입니다. 끔찍한 일입니다. 필요한 것은 나를 너머로”, “더 많게더 성장하도록 초대하는 어떤 사람의 증거입니다. 성 이냐시오는 그것을 더 많이” “졸린 사람을 깨우는 불꽃, 행동의 열정이라고 불렀습니다.

 

The way for one who is lacking passes through the one that is. Jesus didn’t come to abolish the Law or the Prophets, but to bring them to fulfillment. We must begin from the reality to make the leap into “that which is lacking.” We must scrutinize the ordinary to open ourselves to the extraordinary.

 

부족함이 있는 사람의 길이 부족함이 있는 사람의 길을 통하여 지나갑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오시지 않고 오히려 완성하러 오셨습니다. 우리는 현실에서 시작하여 부족한 것 즉, 충만함으로 도약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비범한 사람들에게 자신을 열기 위해서 평범한 사람들을 자세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In these catecheses we will take the two tablets of Moses as Christians, holding Jesus by the hand, to pass from the illusions of youth to the treasure that is in Heaven, walking behind Him. We will discover, in every one of those laws, ancient and wise, the open door of the Father, who is in Heaven, so that the Lord Jesus, who has crossed it, may lead us to the true life, His life, the life of the children of God.

 

우리는 크리스천으로서 예수님의 손을 잡고 예수님을 따라 젊음의 환상으로부터 하늘의 보물을 향해서 가기 위해서 이 교리에서 모세의 두 괘를 택할 것입니다. 우리는 고대의 현명한 그 계명 하나하나로부터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열린 문을 찾아 그 문을 건너셨던 주 예수님께서 우리를 진정한 삶, 그분의 삶, 하느님 자녀의 삶으로 이끄시도록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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