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성경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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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님의 교리

관리자
2018.02.15 10:29 503 0

본문

평화를 빕니다. 교황님의 말씀전례에 관한 교리의 계속입니다.

사실 실제 제목은 교황님의 교리인데 강론이라고 제목을 붙였던 것이 

크게 잘 못됐다는 것을 오늘 교리를 들으면서 뉘우쳤습니다.

 

왜냐하면 강론은 하느님의 메시지를 독서복음 봉독과 함께 잘 전하기

위한 하느님과 회중 간의 대화의 연속이기 때문에 강론 시간에

다른 얘기를 하면 안 된다고 강조하시기 때문입니다.

 

간략하게 짧게 (10분 이내로) 잘 준비해서 하라고 신신 당부하십니다.

강론은 정황적인 이야기, 교리, 회의, 강의가 절대 아니라고 하십니다

윤영학 아오스딩 드림

 

 Pope's Homily - General Audience on February 7, 2018

Dear Brothers and Sisters, good morning! We continue with the catecheses on the Holy Mass. We had arrived at the Readings. The dialogue between God and His People, developed in the Liturgy of the Word of the Mass, reaches its culmination in the proclamation of the Gospel. It is preceded by the singing of the Alleluia or, in Lent, by another acclamation with which “the assembly of the faithful receives and greets the Lord, who is about to speak in the Gospel.”[1] As Christ’s mysteries illumine the whole of biblical revelation, so, in the Liturgy of the Word, the Gospel constitutes the light to understand the meaning of the biblical texts that precede it, be it of the Old or of the New Testament. In fact, Christ is the center and fullness of the whole of Scripture, as well as of the whole liturgical celebration.”[2] Jesus Christ is always at the center, always.

 

교황님의 강론 (2018.2.7. 일반접견)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거룩한 미사에 대한 교리를 계속하겠습니다. 독서를 계속합니다. 말씀전례에서 행해지는 하느님과 그의 백성과의 대화는 복음 선포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복음 전에 알렐루야를 노래합니다. - 사순절에는 다른 찬미를 드립니다만 - 이 알렐루야로 신자들은 이제 복음에서 곧 말씀하실 하느님을 영접하고 인사드립니다.” 그리스도의 신비가 성경적 계시 전체를 비추는 것과 같이, 말씀전례 안에서 복음은 앞서 읽은 독서 - 구약이든 신약이든 - 의 의미를 이해하도록 빛을 비춥니다. 사실 그리스도께서 전례거행 전체와 성경전체의 중심이자 실현이십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항상 중심이십니다.

 

Therefore, the liturgy itself distinguishes the Gospel from the other Readings and surrounds it with particular honour and veneration.[3] In fact, its reading is reserved to the ordained minister, who ends by kissing the Book; we stand to listen to it and trace the sign of the cross on the forehead, on the mouth and on the breast; the candles and incense honour Christ that, through the evangelical reading, makes His effective word resound. The assembly acknowledges with these signs the presence of Christ who gives it the “Good News,” which converts and transforms. It’s a direct discourse that takes place, as if attesting the acclamations with which one responds to the proclamation: “Glory to you, O Lord” and “Praise be to You, O Christ.” We stand to listen to the Gospel, but it’s Christ who is speaking to us there. And so we are attentive, because it’s a direct conversation. It’s the Lord that is speaking to us.

 

그래서 전례자체가 다른 독서와 복음을 구별하고 복음 주위를 특별한 영광과 경배로 감쌉니다. 사실 복음의 봉독은 서품된 사제에게 맡겨지고 사제는 성경에 입맞춤으로 끝을 맺습니다. 우리는 복음을 경청하기 위해 일어서고 성호를 이마, , 그리고 가슴에 긋습니다. 촛불과 향은 그리스도께 영광 돌리고,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적 독서를 통해서 자신의 말씀을 울려 퍼지게 하십니다. 회중은 이 표시로 그리스도의 현존을 인정하고 그리스도께서는 회개시키고 변모시키는 복음을 주십니다. 그 선포에 다음과 같은 찬미로 응답합니다. “주님, 영광 받으소서.”;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이 찬미를 증명하듯이 그 자리에서 일어나는 일은 직접적인 담화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듣기 위해 일어서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의를 기울입니다. 직접적인 대화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Therefore, we don’t read the Gospel in the Mass to know how things happened, but we listen to the Gospel to become aware of what Jesus did and said once; and that Word is living, the Word of Jesus, which is in the Gospel, is living and reaches one’s heart. This is why it’s so important to listen to the Gospel with an open heart, because it’s a living Word. Saint Augustine wrote: “the Gospel is the mouth of Christ. He reigns in Heaven, but doesn’t cease to speak on earth.”[4] If it’s true that in the liturgy “Christ proclaims the Gospel again,”[5] it follows that, taking part in the Mass, we must give Him a response. We listen to the Gospel and we must give a response in our life.

 

그래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기 위해 미사에서 복음을 읽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어떻게 행하시고 말씀하셨는지 이해하기 위해서 복음을 경청합니다.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복음 안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우리의 가슴에 와 닿습니다. 그래서 가슴을 열고 복음을 경청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살아있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성 아우구스투스가 이렇게 얘기합니다. “복음은 그리스도의 입입니다. 그분은 하늘에서 다스리시지만 세상에서 말씀하시는 것을 중지하지 않으십니다.” 전례에서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다시 선포하시는 것이 사실이라면, 미사에 참여하면서 우리는 그분께 응답을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경청하고 우리의 삶으로 응답을 드려야 합니다.

 

To bring His message, Christ also makes use of the word of the priest that, after the Gospel, gives the homily.[6] Earnestly recommended by Vatican Council II as part of the liturgy itself,[7] the homily isn’t a circumstantial discourse or a catechesis, such as the one I’m giving now , or a conference or not even a lesson; the homily is something else. What is the homily? It’s “a taking up again of the dialogue already open between the Lord and His people, so that it finds fulfilment in life. The Gospel’s authentic exegesis is our holy life! The Lord’s word ends its course becoming flesh in us, translated into works, as happened with Mary and the Saints. Remember what I said the last time, the Word of the Lord enters by the ears, reaches the heart and goes to the hands, to good works. And the homily also follows the Lord’s Word and follows this course as well to help us, so that the Lord’s Word, passing through the heart, reaches the hands.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는 또한 복음 봉독 후에 강론을 하는 사제의 말을 이용하십니다. 2차 바티칸 공의회는 전례부분에서 진심으로 권고합니다. 강론은 정황적인 담화, 또는 제가 지금 얘기하는 것과 같은 교리, 또는 회의, 더욱이 강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강론은 다른 무엇입니다. 강론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주님과 그의 백성 사이에 이미 시작된 대화를 계속하여 그 대화가 삶에서 실현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진정한 주해는 우리의 거룩한 삶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성모님과 성인들에게서 그랬던 것과 같이, 우리 안에서 살이 되고, 행동으로 바뀜으로써 그 여정을 마칩니다. 제가 전 주에 말씀드린 것을 기억하십시오. 주님의 말씀은 귀로 들어와서, 가슴에 이르러, 손으로 가고, 선한 행동으로 갑니다. 그리고 강론 또한 주님의 말씀을 따라, 이 여정을 따르고 우리를 돕습니다. 그렇게 해서 주님의 말씀이 가슴을 지나 손에 이르게 됩니다.

 

I have already addressed the argument of the homily in the Exhortation Evangelii Gaudium, where I recalled that the liturgical context “calls for the preaching to orient the assembly, and also the preacher, to a communion with Christ in the Eucharist, which transforms life.”

 

저는 이미 저의 사도적 권고 복음의 기쁨에서 강론에 대해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거기에서 전례적 맥락은 회중과 강론하는 사람 자신의 삶을 변모시키는 성체 안의 그리스도와의 통교로 이끌어야 한다고 말한 것을 기억합니다.

 

One who gives the homily must fulfil well his ministry he who preaches, the priest, or the deacon or the Bishop , offers a real service to all those taking part in the Mass, but those who hear him must also do their part. First of all, by paying due attention, namely, by assuming the right interior dispositions, without subjective demands, knowing that every preacher has merits and limitations. If sometimes there is reason to be bored by a long, or unfocused, or incomprehensible homily, at others times, in stead, it’s prejudice that is the obstacle.

 

강론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사목을 잘 실현해야 합니다 - 강론하는 사람, 사제, 또는 부제 또는 주교는 - 미사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진정한 봉사를 해야 하고 반면에 강론을 경청하는 사람들 또한 그들의 역할을 다해야 합니다. 모든 강론자들이 장점과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마땅한 주의를 기울이고, 주관적인 요구 없이 올바르고 균형된 내적 태도를 가짐으로써 역할 수행이 가능합니다. 어떤 때, 길고, 초점이 없고, 알기 어려운 강론으로 지루하고, 어떤 때는 편견이 장애가 됩니다.

And one who gives a homily must be conscious that he’s not doing something of his own; he is preaching, giving voice to Jesus, he is preaching the Word of Jesus. And the homily must be well prepared; it must be brief, brief! A priest said to me that once he went to another city where his parents lived and his father said to him: “You know, I’m happy, because along with my friends we found a church where there is Mass without a homily!” And how often we see that during the homily some fall asleep, others chat or go outside to smoke a cigarette . . . Therefore, please, make the homily brief, but it must be well prepared. And how is a homily prepared, dear priests, deacons and Bishops? How is it prepared? With prayer, with the study of the Word of God and by doing a clear and brief synthesis; it must not go beyond ten minutes, please.

 

그리고 강론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무엇을 하고 있지 않다는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는 강론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목소리를 빌려드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강론은 잘 준비해야 합니다. 간단하고 짧아야 합니다. 어떤 사제가 제게 말하기를 부모님이 살고 계신 다른 도시에 갔는데 그의 아버지가 사제에게 이렇게 얘기했답니다. “난 요즈음 행복해! 왜냐하면 친구들과 한 성당을 발견했는데 그 성당은 강론 없는 미사가 있더라고!” 얼마나 자주 우리는 강론 중에 자고 있는 사람, 얘기를 하는 사람, 담배를 피우려고 밖으로 나가는 사람을 봅니까? 그래서 제발 강론을 간략하게 하되 잘 준비하도록 하십시오. 친애하는 사제들, 부제들, 그리고 주교들, 어떻게 강론을 준비합니까? 어떻게 준비합니까? 기도와 함께 하느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명확하고 간략한 종합을 하고, 제발 10분을 초과하면 안 됩니다.

 

By way of conclusion we can say that, through the Gospel and the Homily, in the Liturgy of the Word God dialogues with His people, who listen to Him with attention and veneration and, at the same time, recognize Him present and operating. If, then, we listen to the “Good News,” we will be converted and transformed by it, therefore we will be capable of changing ourselves and the world. Why? Because the Good News, the Word of God enters the ears, goes to the heart and reaches the hands to do good works.

 

결론으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복음과 강론을 통해서 말씀전례에서 하느님께서 그분의 백성과 대화하십니다. 하느님 백성은 그분께 온 주의를 기울여. 경배의 마음으로 경청하고, 동시에 그분께서 현존하시고 역사하심을 인식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경청하면 복음에 의해 회개하고 변모합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복음은, 하느님의 말씀은 귀로 들어와, 가슴으로 가고, 손에 이르게 되어 선한 행동을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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