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성경묵상

영어성경묵상

교황님의 강론

관리자
2017.11.19 21:54 185 0

본문

Pope's Homily - General Audience on November 15, 2017

Dear Brothers and Sisters, good morning! We continue with the catecheses on the Holy Mass. To understand the beauty of the Eucharistic Celebration, I want to begin with a very simple aspect: the Mass is prayer, rather, it’s the prayer par excellence, the highest, the most sublime and, at the same time, the most “concrete.” In fact, it’s the encounter of love with God through His Word and the Body and Blood of Jesus. It’s an encounter with the Lord.

 

교황님의 강론 (2017. 11. 15. 일반접견)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거룩한 미사에 대한 강론을 계속하겠습니다. 미사의 아름다움을 이해하기 위해 가장 단순한 관점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미사는 기도입니다. 아주 훌륭한 기도, 지고의 기도, 가장 숭고한 기도이며 동시에 가장 구체적인 기도입니다. 미사는 예수님의 말씀과 몸과 피를 통한 하느님과의 사랑의 만남입니다.

 

However, first we must answer a question. What is prayer really? It is first of all dialogue, personal relationship with God. And man was created as being in personal relationship with God, who finds his fulfilment only in the encounter with his Creator. The journey of life is towards the definitive encounter with the Lord.

 

그러면 우선 기도가 무엇인가부터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기도는 진정 무엇인가? 기도는 무엇보다도 대화입니다. 하느님과의 개인적인 관계입니다. 사람은 하느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가진 존재로서 창조되었습니다. 인간은 창조자와의 만남 안에서만 자기실현을 발견합니다. 삶의 여정은 주님과의 결정적인 만남을 향하고 있습니다.

 

The Book of Genesis affirms that man was created in the image and likeness of God, who is Father and Son and Holy Spirit, a perfect relationship of love, which is unity. From this we are able to understand that all of us have been created to enter into a perfect relationship of love, in a continuous giving and receiving of ourselves to thus be able to find the fullness of our being.

 

창세기는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태어났다고 전합니다. 그 하느님은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이고, 완전한 사랑의 관계이며 일체입니다. 이로부터 우리 모두는 완전한 사랑의 관계로 들어가기 위해 창조되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지속적으로 자신을 주고받으면서, 그래서 우리의 존재의 충만함을 발견하면서, 완전한 사랑의 관계로 들어갑니다.

 

When Moses received God’s call in front of the burning bush, he asked Him his Name. And what did God answer? “I am who I am” (Exodus 3:14). In its original meaning, this expression expresses presence and favour, and, in fact, immediately after God adds: “The Lord, the God of your father, the God of Abraham, the God of Isaac, and the God of Jacob” (v. 15). Thus Christ also, when He calls His disciples, He calls them so that they will be with Him. Therefore, this is the greatest grace: to be able to experience that the Mass, the Eucharist is the privileged moment to be with Jesus and, through Him, with God and with brothers.

 

모세가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모세가 하느님의 이름을 물었고, 하느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나는 있는 나다.” (탈출기 3,14) 이의 원래의 뜻은 현존과 호의이며 곧 이어서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너희의 조상들의 하느님, 곧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야훼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라고 하여라.” (15)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도 제자들을 부르실 때, 그들이 자신과 함께 있도록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가장 위대한 은총입니다. 그 미사를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은 큰 은총입니다. 성체성사는 예수님과 함께 있는 영광스러운 순간입니다. 그분을 통해서 하느님과 형제들과 함께 있습니다.

 

To pray, as every true dialogue, is also to be able to remain in silence, in dialogues there are moments of silence , in silence together with Jesus. And when we go to Mass, perhaps we arrive five minutes early and we begin to chat with the one who is next to us. However, it’s not the moment to chat: it’s the moment of silence to prepare oneself to dialogue. It’s the moment to recollect oneself in the heart to prepare oneself for the encounter with Jesus. Silence is so important! Remember what I said last week: we are not going to a show; we are going to an encounter with the Lord, and silence prepares us and accompanies us. We remain in silence together with Jesus. And from God’s mysterious silence gushes His Word, which resounds in our heart.

 

모든 진정한 대화가 그렇듯이 기도하는 것 또한 침묵 가운데 머물 수 있습니다. 대화 중에 침묵의 순간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조용히 머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미사에 갈 때, 5분 전에 도착하여 옆 사람과 얘기를 한다고 하지요. 그러나 그 때는 얘기하는 시간은 아닙니다. 그 때는 대화를 준비하기 위한 침묵의 순간입니다. 그때는 예수님과의 만남을 준비하기 위하여 마음을 가라앉힐 순간입니다. 침묵은 아주 중요합니다. 지난 주일에 제가 한 말을 기억해주십시오. 우리는 쇼를 보러 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과의 만남을 위해 가고, 침묵은 우리를 준비시키고 우리를 동반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침묵 안에 머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신비로운 침묵에서 그분의 말씀이 터져 나오고 그 말씀은 우리의 마음 안에 울려퍼집니다.

 

Jesus Himself teaches us how it is really possible “to be” with the Father and He demonstrates it with His prayer. The Gospels show us Jesus who withdraws to places apart to pray. The disciples seeing this, His intimate relationship with the Father, feel the desire to be able to participate in it, and they ask Him: “Lord, teach us to pray” (Luke 11:1). We heard it in the First Reading at the beginning of the Audience. Jesus answers that the first thing necessary go pray is to be able to say “Father.” Let’s be careful: if I’m not capable of saying “Father,” I’m not capable of praying. We must learn to say “Father,” namely, to put ourselves in His presence with filial confidence. However, to be able to learn, it is necessary to recognize humbly that we are in need of being instructed, and to say with simplicity: Lord, teach me to pray.

 

예수님께서 몸소 성부와 함께 있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가르쳐주시고 자신의 기도로 그것을 보여주십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한적한 곳으로 가시어 홀로 기도하시는 것을 보여줍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성부와의 친밀한 관계를 보고 자신들도 참여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예수님께 이렇게 청합니다. “주님,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루카 11,1) 우리는 오늘 제 1독서에서 그것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기 위해 첫째로 필요한 것이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자 잘 들으십시오. 내가 아버지라고 말할 수 없으면 나는 기도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자녀의 확신을 가지고 그분의 현존에 우리 자신을 맡기고 아버지라고 말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배우기 위해서, 우리는 가르침을 받아야 하고, 그저 주님, 제게 기도하는 법을 알려주십시오.”라고 말씀드려야 함을 겸손히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This is the first point: to be humble, to recognize ourselves children, to rest in the Father, to trust Him. To enter the Kingdom of Heaven it’s necessary to make oneself little as children, in the sense that children know how to trust, they know that someone will take care of them, of what they will eat, of what they will wear and so on (Cf. Matthew 6:25-32). This is the first attitude: trust and confidence, as a child towards his parents’ to know that God remembers you and takes care of you, of you, of me, of all.

 

이것이 첫째 포인트입니다. 겸손하고, 우리 자신을 자녀로 인정하고, 아버지께 맡기도 그분을 믿는 것입니다.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자신을 어린이처럼 작게 만드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린이는 믿을 줄을 압니다. 다른 사람이 보호해줄 것을 압니다. 어떻게 먹어야 하고 어떻게 입어야 하는 것 등을 알려줄 것을 믿는 어린이처럼 되어야 합니다. (마태오 6,25-32 참조) 이것이 첫 번째 태도입니다. 어린이가 부모에게 하듯이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기억하시고, 여러분과 나와 모두를 보호해주실 것이라는 것을 믿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The second predisposition, which is also proper to children, is to let oneself be surprised. A child always asks a thousand questions because he wants to discover the world, and he marvels even at small things, because everything is new to him. To enter in the Kingdom of Heaven it is necessary to let oneself be surprised. I ask, in our relationship with the Lord, in prayer, do we let ourselves be surprised or do we think that prayer is to talk to God as parrots do? No, it’s to trust and to open one’s heart to let oneself be surprised. Do we let ourselves be surprised by God who is always the God of surprises? Because the encounter with the Lord is always a living encounter, it’s not a museum encounter. It’s a living encounter and we go to Mass not to a museum. We go to a living encounter with the Lord.

 

두 번째 태도는 역시 어린이의 성향과 같은 것으로서 놀랄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어린이는 세상을 알고 싶어서 많은 질문을 합니다. 그리고 아주 작은 일에도 놀랍니다. 모든 것이 그에게는 새롭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이렇게 놀랄 준비를 하는 것이 좋습니다.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주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기도할 때, 놀랄 준비를 합니까 아니면 기도가 하느님께 앵무새가 하듯이 얘기하는 것으로 생각합니까? 아닙니다. 믿고, 가슴을 열고, 놀랄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만남은 항상 살아있는 만남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박물관 만남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만남이며 우리는 미사에 가는 것이지 박물관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과의 살아있는 만남을 하기 위해 가는 것입니다.

 

In the Gospel there is talk of a certain Nicodemus (John 3:1-21), an elderly man, an authority in Israel, who goes to Jesus to get to know Him, and the Lord speaks to him of the need to be “born anew” (Cf. v. 3). But what does it mean? Can one be “reborn”? Is it possible to have again the taste, the joy, the wonder of life even in face of so many tragedies? This is a fundamental question of our faith and this is the desire of every true believer: the desire to be born anew, the joy of beginning again. Do we have this desire? Do each one of us always have the desire to be born anew to encounter the Lord? Do you have this desire? In fact, it can be easily lost because, given so much activity, so many projects to implement, at the end there is little time left and we lose sight of what is fundamental: our life of the heart, our spiritual life, our life which is encounter with the Lord in prayer.

 

복음에 확신에 가득 찬 니코데모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요한 3,1-21) 이스라엘의 원로 관리로서 예수님을 더 알기 위해서 예수님께로 갑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새로 태어나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3) 무엇을 뜻할까요? 사람이 새로 태어날수 있나요? 수많은 비극 앞에서 삶의 맛, 기쁨, 놀라움을 다시 찾는 것이 가능할까요? 이것은 우리 신앙의 근본적인 질문이며 이것은 모든 진정한 신자의 욕망입니다. 다시 태어나고자 하는 욕망, 다시 시작하는 기쁨입니다. 우리는 이 욕망을 가지고 있나요? 우리 각자는 항상 주님의 대면하기 위해 다시 태어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나요? 여러분은 이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까? 사실 이 욕망은 쉽게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너무 많은 활동, 수많은 계획을 수행하다보면, 마지막으로 남는 시간이 없습니다. 그래서 근본적인 것을 간과하게 됩니다. 즉 우리 마음의 삶, 우리의 영적인 삶, 기도 안에서 주님을 만나는 우리의 삶을 간과하게 됩니다.

 

In truth, the Lord surprises us by showing us that He loves us also in our weaknesses. “Jesus Christ [. . .] is the victim of expiation for our sins, and not for ours only but also for the sins of the whole world” (1 John 2:2). This gift, source of true consolation but the Lord forgives us always this consoles, it’s a true consolation, it’s a gift that is given to us through the Eucharist, that nuptial banquet in which the Bridegroom meets our frailty. Can I say that when I go to Communion in the Mass, the Lord encounters my frailty? Yes! We can say it because this is true! The Lord encounters our frailty to take us back to our first calling: that of being in the image and likeness of God. This is the environment of the Eucharist; this is prayer.

 

진실로 주님께서는 우리가 약할 때에도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보여주심으로써 우리를 놀라게 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우리 죄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요한 12,2) 이 선물, 진정한 위안의 원천 -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를 항상 용서하십니다. - 이 위안, 그것은 진정한 위안입니다. 그것은 성체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입니다. 신랑이 우리의 약함을 만나는 그 결혼잔치. 미사에서 성체를 영할 때 주님께서 나의 약함을 대면하신다고 말할 수 있나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약함을 대면하시고 우리를 처음 부르셨던 때로 되돌리십니다. 하느님의 모상을 지닌 상태로 되돌리십니다. 이것이 성체성사입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번역: 윤영학 아오스딩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