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성경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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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님의 강론

관리자
2017.10.23 21:39 381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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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pe's Homily - General Audience on October 18, 2017

Dearest Brothers and Sisters, good morning! Today I would like to compare Christian hope with the reality of death, a reality that our modern civilization tends increasingly to efface. Thus, when death comes, for one who is close to us or for ourselves, we find ourselves unprepared, deprived even of an appropriate “alphabet” to articulate meaningful words about its mystery, which in any case remains. Yet the first signs of human civilization transited in fact through this enigma. We can say that man is born with the cult of the dead.

 

교황님의 강론 (2017. 10. 18. 일반접견)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 저는 크리스천 희망과 죽음의 실제와 비교해보겠습니다. 우리의 현대문명은 그 죽음의 실제를 자꾸 지우려고 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까운 사람이나 우리에게 죽음이 닥칠 때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서 죽음의 신비에 대한 의미 있는 글의 첫 단어조차 찾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신비는 어쨌든 존재합니다. 인간 문명의 첫 기록들은 사실 이 수수께끼를 통해서 전해졌고, 사람은 죽은 이들에 대한 예찬과 함께 태어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Other civilizations, before ours, had the courage to look at it in the face. It was an event recounted by the elderly to the new generations, as an inescapable reality that obliged man to live for something absolute. Psalm 90 states: “Teach us to number our days that we may get a heart of wisdom” (v. 12). To number our days so that our heart becomes wise! words that lead us to a healthy realism, dispelling the delusion of omnipotence. What are we? We are “almost nothing,” says another Psalm (Cf. 88:48); our days run off fast: even if we lived a hundred years, at the end it will all seem as if it was a flash. Many times I’ve heard elderly people say: “Life passed for me as a flash . . .”

 

우리 문명의 전에 있었던 다른 문명들은 죽음의 실제를 직시하는 용기를 가졌었습니다. 노인들이 젊은이들에게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실제이고, 그래서 인간은 절대적인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이야기 해주는 것이 일종의 행사였습니다. 시편 90은 이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저희의 날수를 셀 줄 알도록 가르치소서. 저희가 슬기로운 마음을 얻으리이다.” (90,12) 우리의 마음이 슬기로워지도록 우리의 날수를 세는 것입니다. 무한할 것이란 망상을 떨쳐 버리고 건전한 사실주의로 우리를 이끄는 말입니다. 우리는 무엇인가요?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다른 시편구절에서 얘기합니다. (89,48 참조) 우리의 날들은 빠르게 지나갑니다. 우리가 100살을 산다고 해도 그것은 한낱 섬광처럼 보입니다. 노인들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많이 들었습니다. “인생은 내게 섬광처럼 지났습니다......”

 

Thus death strips our life. It makes us discover that our acts of pride, of wrath, of hatred were vanity, pure vanity. We realize with regret that we didn’t love enough and that we didn’t seek what was essential. And, on the contrary, we see what we sowed that was truly good: the affections for which we sacrificed ourselves, and that now hold our hand.

 

죽음은 우리의 생명을 빼앗아 갑니다. 죽음은 우리에게 교만, 분노, 미움이 헛되다는 것, 매우 헛되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우리는 후회하며, 사랑을 충분히 하지 않았고, 핵심적인 것을 추구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그리고 반대로 우리가 씨 뿌렸던 것이 진정 좋았다는 것을 알고, 우리가 사랑을 위해 희생했던 그것이 지금 우리의 손을 잡아준다는 것을 압니다.

 

Jesus illumined the mystery of our death. With His conduct, He permits us to feel sorrowful when a dear person goes. He was “profoundly” upset before the tomb of His friend Lazarus, and He “wept” (11:35). In this attitude of His, we feel Jesus very closeour brother. He wept for His friend Lazarus.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죽음의 신비를 비추어주셨습니다. 그분은 행동으로 우리에게 귀중한 사람이 죽을 때 슬픔을 느끼도록 허락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친구 라자로의 무덤 앞에서 매우슬퍼하시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요한 11,35) 그분의 이런 태도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와 매우 가까운 - 우리의 형제, 로 느낍니다. 그분은 친구 라자로를 위해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And then Jesus prays to the Father, source of life, and orders Lazarus to come out of the sepulcher. And so it happens. Christian hope draws from this attitude, which Jesus assumes against human death: if it is present in Creation, it is, however, a scar that spoils God’s design of love, and the Savior wants to heal it.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생명의 원천이신 하느님께 기도하시고, 라자로에게 무덤에서 나오라고 명하십니다. 그렇게 그 일이 일어납니다. 크리스천 희망은 예수님께서 인간의 죽음에 반하여 취하신 이 태도에서 나옵니다. 창조에서 죽음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의 설계를 망치는 상처이고, 그 상처를 구원자께서는 치유하기를 원하십니다.

 

Elsewhere the Gospels talk about a father whose daughter is very sick, and he turns to Jesus with faith so that He will save her (Cf. Mark 5:21-24.35-543). There is no more moving figure than that of a father or a mother with a sick child. And Jesus goes immediately with that man, who was called Jairus. At a certain point someone arrives from Jairus’ house to say that the girl is dead, and there’s no longer need to trouble the Teacher. However, Jesus says to Jairus: “Do not fear, only believe!” (Mark 5:36). Jesus knows that that man is tempted to react with anger and despair, because the little girl is dead, and he recommends to him to cherish the small flame burning in his heart: faith. “Do not fear, only have faith.” “Do not fear, continue to have that flame burning!” And then, arriving at the house, He awakes the little girl from death and restores her alive to her dear ones.

 

복음의 다른 곳에 매우 아픈 딸을 둔 아버지에 관해 얘기합니다. 그가 예수님께 믿음을 가지고 접근하여 예수님께서 그의 딸을 고쳐주시는 얘기입니다. (마르코 5,21-24, 35-43 참조) 자식이 아픈 어머니나 아버지보다 더 감동적인 모습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그 야이로라고 불리는 아버지를 따라 나서십니다. 그때 야이로의 집에서 온 하인이 딸은 이미 죽었기 때문에 더 이상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없다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야이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마르코 5,36)_ 예수님께서는 어린 딸이 죽었기 때문에 그가 분노와 절망의 반응을 취할 유혹을 받고 있을 것이란 것을 아시고 그에게 그의 가슴 속에 타고 있는 작은 불꽃 즉, 믿음을 소중히 여기도록 권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두려워하지 말고 그 불꽃이 계속 타게 하여라.” 그리고 그 집에 도착하시어 예수님께서 그 어린 소녀를 죽음에서 깨우시고 소녀를 사랑하는 부모에게 살아있는 딸로 다시 세우십니다.

 

Jesus puts us on this “ridge” of faith. To Martha weeping for the death of her brother Lazarus He opposes the light of a dogma: “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he who believes in me, though he die, yet shall he live, and whoever lives and believes in me shall never die. Do you believe this?” (John 11: 25-26). It’s what Jesus repeats to each one of us every time that death comes to tear the fabric of life and of affections. Our whole existence is played out here, between the slope of faith and the precipice of fear. Jesus says: I am not death, I am the resurrection and the life; do you believe this? Do you believe this?” Do we, who are in the Square today, believe this?

 

예수님께서 이 믿음의 등성이위에 우리를 세우십니다. 오빠 라자로의 죽음에 슬피 우는 마르타에게 예수님께서는 교의의 빛을 제시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이것은 죽음이 닥쳐서 삶과 사랑의 관계를 찢어놓을 때마다 예수님께서 우리각자에게 되풀이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온 존재는 믿음의 언덕과 두려움의 벼랑 사이 여기에서 끝을 맺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죽음이 아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너희는 이것을 믿느냐? 너는 이것을 믿느냐? 오늘 이 광장에 모인 우리는 이것을 믿습니까?

 

We are all small and vulnerable before the mystery of death. However, what a grace if in that moment we cherish in our heart the little flame of faith! Jesus will take us by the hand, as He took the hand of Jairus’ daughter, and repeat once again: “Talita kum,” “Little girl, arise!” (Mark 5:41). He will say it to us, to each one of us: “Get up, arise!” I now invite you to close your eyes and to think of that moment of our death. Each one of us think of his death and imagine that moment that will come, when Jesus will take us by the hand and say to us: Come, come with me, arise.” Hope will end there and it will be the reality, the reality of life. Think about it: Jesus Himself will come to each one of us and will take us by the hand, with His tenderness, His meekness, His love. And each one repeat in his heart Jesus’ word: “Get up, come. Get up, come. Get up, arise!”

 

죽음의 신비 앞에서 우리 모두는 작고 취약합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 우리의 가슴 안에 작은 믿음의 불꽃을 간직하고 있다면 이 얼마나 큰 은총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야이로의 딸을 일으키신 것처럼 우리의 손을 잡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야이로의 딸에게 하셨던 탈리타쿰,” “어린 소녀야 일어나라.” (마르코 5,41)를 우리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 각자에게 일어나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저는 지금 여러분에게 눈을 감고 우리 죽음의 순간을 생각해보시도록 초대합니다. 우리 각자가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고 예수님께서 우리의 손을 잡으시고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그 순간을 상상해봅니다. “오너라 나에게 오너라 그리고 일어나라.” 희망은 그곳에서 끝나고, 실제로 바뀔 것입니다. 생명의 실제로.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손수 우리 각자에게 오시어, 그분의 부드러움과, 그분의 온유함과, 그분의 사랑으로, 우리의 손을 잡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각자는 가슴 속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거듭 말할 것입니다. “일어나라, 일어나서 와라, 일어나나. 일어서라.”

 

This is our hope in face of death. For one who believes, it’s a door that opens completely; for one who doubts it’s a chink of light that filters from a doorway that was not altogether closed. However, for all of us it will be a grace, when this light, of the encounter with Jesus, will illuminate us.

 

이것이 죽음 앞에 우리의 희망입니다. 믿는 사람에게 그것은 완전히 열려지는 문입니다. 의심하는 사람에게 그것은 꽉 닫히지 않은 문에서 새어나오는 한줄기 빛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에게 예수님과의 만남의 이 불빛이 우리를 비출 때 그것은 은총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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