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님의 강론

2017.09.30 23:15 471 0


Pope's Homily - General Audience on September 27, 2017

Dear Brothers and Sisters, good morning! In this time we are talking about hope; however, today I would like to reflect with you on the enemies of hope, because hope has its enemies, as every good in this world has its enemies.


교황님의 강론 (2017. 9. 27. 일반접견)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희망을 얘기하고 있습니다만 오늘은 여러분과 함께 희망의 적들에 대해서 묵상하고자 합니다. 희망도 이 세상의 모든 좋은 것들이 적이 있듯이 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And there came to mind the ancient myth of Pandora’s box: the opening of the box set off so many disasters for the history of the world. Few, however, remember the last part of the story, which opens a chink of light: after all the evils came out of the mouth of the box, a miniscule gift seems to take revenge in face of all that evil that is spilling out. Pandora, the woman who is guarding the box perceives the last: the Greeks call it elpis, which means hope.


우선 옛 신화에 나오는 판도라의 상자가 생각나는군요. 상자를 여는 순간 세상 역사에 나오는 수많은 재난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작은 틈새의 불빛을 여는 그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겁니다. 상자에서 수많은 악이 나온 후에 아주 작은 선물이 넘쳐 나온 모든 죄악 앞에서 복수를 감행하는 것 같습니다. 그 상자를 지키는 여인 판도라는 마지막을 감지합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그것을 엘피스 즉 희망이라고 부릅니다.


This myth tells us why hope is so important for humanity. It’s not true that “so long as there is life there is hope,” as is usually said. If anything, it’s the contrary: it’s hope that keeps life upright, that protects it, guards it and makes it grow. If men had not cultivated hope, if they were not supported by this virtue, they would never have comes out of the caves, and would have left no trace in the history of the world. It’s the most divine <thing> that can exist in man’s heart.


이 신화는 왜 희망이 인간에게 그렇게 중요한지를 얘기해줍니다. 흔히 얘기하는 생명이 있는 한 희망이 있다라는 말은 맞지 않습니다. 사실 그 반대입니다. 생명을 올곧게 세우고, 보호하고, 지키고, 자라게 하는 것은 희망입니다. 사람이 희망을 기르지 않으면, 그들이 이 덕의 지지를 받지 않으면, 그들은 절대로 동굴 밖으로 나오지 않았을 것이고 세상 역사에 아무 족적도 남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 안에 존재하는 가장 하느님적인 <>입니다.


A French poet Charles Peguy has left us wonderful pages on hope (Cf. “The Portal of the Mystery of Hope”). He says, poetically, that God is not so astonished by the faith of human beings or by their charity, but what really fills Him with wonder and emotion is people’s hope: “That those poor children he writes see how things are going and believe that it will be better tomorrow morning.” The poet’s image recalls the faces of the many people that have passed through this world peasants, poor labourers, migrants in search of a better future that have fought tenaciously despite the bitterness of a difficult today, full of so many trials, encouraged, however, by the confidence that the children would have a more just and more serene life. They struggled for their children; they struggled in hope.


프랑스 시인 샤를 페기는 우리에게 희망에 대한 놀라운 글을 남겼습니다. (“희망의 신비의 문참조) 그는 시적으로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믿음이나 자선 때문에 놀라지 않으시며, 하느님을 진정 놀라움과 감동으로 벅차게 하는 것은 사람들의 희망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그 가난한 어린이들이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내일 아침은 더 좋아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시인의 묘사가 이 세상을 거쳐 간 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떠오르게 합니다 - 농부들, 가난한 노동자들, 더 좋은 미래를 찾는 난민들 - 그들은 수많은 시련으로 가득 찬 어려운 오늘의 쓰라림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자식들은 더 정의롭고 더 조용한 삶을 가질 것이라는 믿음에 용기를 얻어, 끈질기게 투쟁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자녀들을 위해 투쟁하였습니다. 희망을 가지고 투쟁하였습니다.


Hope is the thrust in the heart of one who sets out, leaving home, land, sometimes family and relatives I think of migrants to seek a better life, more fitting for himself and his dear ones. And it’s also a thrust in the heart of one who receives: the desire to encounter one another, to get to know one another, to dialogue . . . Hope is the thrust to “share the journey,” because the journey is done in two: those who come to our land, and we who go to their heart, to understand them, to understand their culture, their language. It’s a journey of two, but without hope that journey can’t be done. Hope is the thrust to share the journey of life, as Caritas’ Campaign reminds us, which we open today. Brothers, let’s not be afraid to share the journey! Let’s not be afraid to share hope!


희망은 더 좋은 삶,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에게 더 맞는 삶을 향해 출발하고, , 고향, 급기야 가족과 친척을 떠나는 사람의 마음속의 추진력입니다. 또한 서로를 만나기 위해, 서로를 알기 위해, 대화하기 위해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마음속의 추진력입니다. 희망은 여정을 공유하는추진력입니다. 여정은 둘이서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땅으로 오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의 문화와 그들의 언어를 이해하기 위해서 그들의 마음으로 다가가는 우리들이 함께하는 여정입니다. 둘이 하는 여정입니다. 그러나 희망 없이는 그 여정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희망은 우리가 오늘 거행하는 까리따스 캠페인이 우리에게 환기시키는 바와 같이 삶의 여정을 공유하는 추진력입니다. 형제 여러분, 여정을 공유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희망을 공유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Hope is not a virtue for people with a full stomach. See why the poor have always been the first bearers of hope. And in this connection we can say that the poor, also the beggars, are the protagonists of History. God had need of them to enter in the world: of Joseph, of Mary, of the shepherds of Bethlehem. On the night of the first Christmas, there was a world that was sleeping, comfortable in so many acquired certainties. However, the humble were preparing in hiddenness the revolution of kindness. They were poor in everything, some floated a bit above the threshold of survival, but they were rich in the most precious good that exists in the world, namely, the desire for change.


희망은 배부른 사람들을 위한 덕이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왜 항상 먼저 희망을 갖는지 보십시오. 이와 관련하여 가난한 사람들과 거지들이 역사의 주인공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에 들어오시기 위해 그들이 필요했습니다. 그들은 바로 요셉, 마리아, 그리고 베들레헴의 목동들입니다. 첫 번째 크리스마스 밤에 세상은 잠자고 있었습니다. 벌어들인 수많은 확신 안에 편안하게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들은 보이지 않게 친절한 혁명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면에서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생존 한계를 약간 상회하는 사람들이었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귀중한 선을 풍성히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변화에 대한 갈망이었습니다.


Sometimes, to have had everything in life is a misfortune. Think of a youth who was not taught the virtue of waiting and of patience, who hasn’t had to sweat for anything, who has forged ahead and at 20 “knows already how the world runs”: he is destined to the worst condemnation: that of not desiring anything more. He seems a youth; instead, autumn has already fallen on his heart. They are the young people of autumn.


삶에서 모든 것을 갖는 것이 불행인 때가 있습니다. 기다리는 덕과 인내하는 덕을 배우지 못했고, 어떤 것을 위해 땀 흘린 적이 없고, 앞으로만 나가서 20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가를 이미 알고 있는젊은이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는 최악의 벌을 받을 운명에 처해 있습니다. 그것은 더 이상 무엇도 갈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는 젊은 것 같지만, 그의 마음에는 이미 가을이 왔습니다. 그들은 가을의 젊은이들입니다.


To have an empty mind is the worst obstacle to hope. It’s a risk of which no one can say to himself that he is excluded, because to be tempted against hope can also happen when one is following the way of the Christian life. The monks of antiquity denounced one of the worst enemies of fervour. They said it thus: that “midday demon” that goes to extinguish a life of commitment, precisely while the sun burns on high. This temptation surprises us when we least expect it: the days become monotonous and boring, no value seems worthy of hard work anymore. This attitude is called accidia, which erodes life from inside until leaving it as an empty shell.


텅빈 마음을 갖는 것은 희망에 대한 최악의 장애물입니다. 그것은 아무도 자신은 안전하다고 말할 수 없는 위험입니다. 왜냐하면 크리스천 삶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옛 수도자들은 열정의 가장 나쁜 적중의 하나를 멸시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해가 중천에서 이글거리고 있을 때, 헌신의 삶을 없애러 가는 한낮의 악마라고 했습니다. 이 유혹은 우리가 예상하고 있지 않을 때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나날이 단조롭고 지루해지고, 아무것도 열심히 할 가치가 없어 보입니다. 이런 태도를 아씨디아라고 하는데 이것은 속으로부터 갉아내려 결국 빈 껍질만 남기게 됩니다.


When this happens, a Christian knows that this condition must be combatted, never accepted supinely. God has created us for joy and happiness, and not to bask in melancholic thoughts. See why it’s important to guard one’s heart, opposing temptations to unhappiness, which certainly don’t come from God. And there, where our strength seems weak and the battle against anguish is particularly hard, we can always resort to Jesus’ name. We can repeat that simple prayer, of which we also find traces in the Gospels and which has become the foundation of so many Christian spiritual traditions: “Lord Jesus Christ, Son of the living God, have mercy on me a sinner!” a beautiful prayer. “Lord Jesus Christ, Son of the living God, have mercy on me a sinner!” This is a prayer of hope, because I turn to him who can open wide the doors and resolve the problem, and make me look at the horizon, the horizon of hope.


이런 일이 생기면 크리스천들은 이 상황과 투쟁을 해야 하고 절대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는 것을 압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기뻐하고 행복해 하기 위해 창조하셨습니다. 우울한 생각에 빠지라고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불행해지려는 유혹에 대항하여 우리의 마음을 방어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 보십시오. 그 유혹은 분명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의 힘이 약해지고 근심에 대항하는 투쟁이 특별히 어려워질 때 우리는 항상 예수님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단순한 기도를 되풀이할 수 있습니다. 복음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는 단순한 기도는 많은 크리스천 영성의 전통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여,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이시여, 죄인인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여,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이시여, 죄인인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이것은 희망의 기도입니다. 문을 활짝 열고 문제를 푸시는 그분께 의탁하고, 내가 지평을, 희망의 지평을 볼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Brothers and sisters, we’re not alone in battling against despair. If Jesus has overcome the world, He is able to overcome in us all that is opposed to the good. If God is with us, no one will rob us of that virtue of which we are in absolute need to live. No one will rob us of hope. Let’s go forward!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절망과의 투쟁에서 혼자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극복하셨다면 그분께서 우리 안에서 선에 대항하는 모든 것을 극복하실 수 있으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아무도 우리에게서 삶에서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는 덕을 뺏어갈 수 없습니다. 아무도 우리에게서 희망을 뺏어갈 수 없습니다. 모두 앞으로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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